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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BALL

열정의 사나이 루이스 엔리케

 

 

스포르팅 히혼에서는 스트라이커로 뛰었고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중앙 수비수로 뛰다가 이적해온 바르셀로나에서는 다시 스트라이커로 뛰면서 15골. 그리고 다시 미드필더로. 아마 루이스 엔리께처럼 포지션 변경을 자주 해본 선수도 드물 것이다.

 

레알 마드리드 출신임에도 바르셀로나에서는 이미 알깐떼라, 쿠발라, 크루이프, 스토이치코프, 과르디올라와 같은 레전드급으로 대우받고 있는 루이스 엔리케. 바르셀로나의 "Boxis Noir"라고 불리는 열혈팬들은 그에게 "Dios"라는 별명을 주면서 그에게 깜 노우에서 항상 응원을 보냈다. 잘하든 못하든 말이다. 그리고 루이스 엔리께는 팬들에게 한번 보란 듯이 항상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팀이 상승무드를 탈 때는 직접 득점에 가담하며 골을 넣어주었고 하향무드를 탈 때는 미드필더임에도 수비라인까지 내려와서 수비를 해내며 실점을 막아내는 등 그의 플레이는 항상 투혼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그에 대하여 前 스페인축구대표팀 감독이었던 끌레멘떼는 "내가 여자였다면 엔리케와 결혼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에 대하여 극찬을 보냈다.

 

바르셀로나 그리고 스페인대표팀에서 뛰면서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었고 이런 화려한 축구생활을 접고 은퇴를 해 팬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정열적인 아스뚜리아스인 루이스 엔리께는 스페인의 서북부 지방에 있는 아스뚜리아스 주의 수도이며 유럽에서 가장 맛있는 사과가 나는 곳으로 유명한 히혼에서 태어났다.

 

아스뚜리아스 주 역시 바스크나 까딸루냐 그리고 안달루시아나 발렌시아 주처럼 독립적인 하나의 주로써 지역 대표팀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런 환경 때문에 루이스 엔리께는 어렸을 때 엘리스부루라는 학교 축구클럽에 가입하면서 축구와의 인연을 시작하는데 물론 이때에는 직업축구선수보다는 그냥 취미로 볼을 차는 것에 흥미가 있었기에 말 그대로 흥미에서 끝날법했지만 그의 재능을 본 스포르팅 히혼의 클럽관계자들은 엔리께에게 입단을 권유하게 되고 고심 끝에 엔리께는 학업을 포기하고 열 다섯 살에 스포르팅 히혼 유스팀에 정식으로 입단하게 된다. 당시 그를 가르쳤던 이글레시아스는 "바람 같은 선수"라면서 그의 플레이를 아주 좋아했는데 이곳에서 스트라이커로 뛰면서 3년간 100골 가까이 득점한 엔리께는 1989년에 스포르팅 히혼과는 "아스투리아스 데르비"를 이루며 라이벌관계에 있는 레알 오비에도와의 경기에도 출전하게 된다.

 

그의 활약은 자연히 다른 라이벌 클럽으로의 흥미를 유발하기에 충분했으니 오비에도와 아틀레티꼬 마드리드가 관심을 나타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인 마리아넬리는 그가 다른 팀으로 이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스포르팅 히혼에는 엔리께 이외에도 99-2000시즌에 밀로세비치, 아쿠냐와 함께 사라고사 돌풍을 주도한 후아넬레 그리고 98 프랑스월드컵 때 스페인대표팀에 발탁되기도 했던 만하린같은 쓸만한 어린 선수들이 많았는데 그의 친구들은 엔리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엔리께는 다리가 아주 얇은 선수였어요. 아마 그는 그것 때문에 지독한 콤플렉스가 있었을 겁니다. 그는 그걸 보여주기조차도 싫었는지 경기 내내 계속 뛰어다니기만 했습니다."

 

 

그는 19살 때 스포르팅 히혼의 성인팀에 올랐고 9월 24일에 있었던 말라가전에서 첫 데뷔경기를 치르고 여기에서의 활약으로 히혼은 90-91시즌에 UEFA컵 진출까지 하는 기염을 토해내는데 그중 엔리께의 활약이 으뜸이었기에 팬들은 그에게 "아스뚜리아스의 왕자"라는 그의 이미지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별명을 붙여주기도 하는데 그 시즌을 마지막으로 엔리께는 스페인 최고의 클럽인 하얀 사자군단 레알 마드리드에 깜짝 입단하며 세인들을 놀라게 한다.

 

그다음 해였던 92년은 스페인에는 큰 행사가 세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세비야 엑스포이며 또 하나는 스페인이 건국 이래 가장 전성기를 맞이한 1492년 이후 500년이 되는 바로 그 해였고 마지막으로는 스페인 최초로 올림픽이 개최되는 시기였기도 하다. 아스뚜리아스 클럽에서 유일하게 올림픽에 나가게 된 엔리께. 올림픽팀에는 키꼬, 과르디올라, 알폰소, 아벨라르도, 세르히, 토니 등 쟁쟁한 선수들이 많았고 라이트 윙으로 뛴 엔리께는 이들과 함께 스페인에 사상 첫 금메달을 안겨준다.

 

 

하지만 그의 새로운 소속팀 마드리드에는 우고 산체스 그리고 부트라게뇨같은 뛰어난 스트라이커들이 많았기에 엔리께는 제대로 출장시간을 갖지 못하고 벤치에 머물러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92-93시즌에 프리메라리가 4번 연속 피치치라는 금자탑을 세운 우고 산체스가 멕시코로 돌아가자 엔리께는 드디어 마드리드에서 제대로 뛸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의 기대는 완전히 깨져버리게 되었다. 마드리드는 엔리께를 기용하는 대신에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이반 사모라노를 영입하면서 엔리께라는 젊은 싹에 꿈을 뺏어버리게 된다. 당시 감독이었던 플로로는 엔리께에게 세비야로의 이적을 권유하기도 했지만 엔리께는 잔류를 선언해 그는 또다시 벤치히터로 전락하게 된다. 물론 플로로는 "엔리께는 아주 안정적인 플레이어"라면서 극찬했지만 이미 한번 우고 산체스라는 남미 특급의 맛을 본 레알 마드리드가 또 다른 남미선수인 사모라노에게 더 많은 출장기회를 줄 것이다라는 것은 엔리께 그 자신이 더 잘 알았을듯하다. 그러나 엔리께에게는 또 한 번의 도약의 기회가 있었으니 94 미국월드컵 스페인대표팀에 발탁되었다는 통보가 그에게 날아온 것이다.

 

후아넬레 그리고 아벨라르도 같은 고향 친구들. 그리고 까니사레스, 과르디올라 등 이른바 "꼬비"라고 불리는 바르셀로나 올림픽 우승동료들과 함께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그러했듯이 이들은 미국땅을 밟게 되는 영광을 안게 된다. 히혼 시절부터 그의 재능을 알아본 클레멘떼는 그를 살리나스와 투톱을 시키게 되는데 한국전 그리고 독일전에서 무득점에 그치자 볼리비아전에서는 뛰지 못하며 팀의 3대1 승리를 벤치에서만 지켜봐야 했다. 하지만 다시 출전한 스위스와의 16강전에서 엔리께는 팀의 두 번째 골을 터트리면서 기념비적인 그의 월드컵 첫 골을 쏘아 올린다. 그리고 보스턴에서 있었던 이탈리아와의 8강전 당시 전문가들은 예선전 그리고 16강전 내내 부진했던 이탈리아보다는 스페인에 더 점수를 주었다.

 

 

역시나 뚜껑을 열어본 그 날 경기는 스페인의 일방적인 페이스였고 이탈리아는 역시나 가데나치오를 앞세워 선 수비 후 공격 전술로 스페인전을 치렀는데 전반전에 디노바조의 기습적인 한방으로 스페인은 오히려 0대1로 뒤처지게 된다. "우노제로(1-0)"로 불리는 이탈리아의 수비에 대한 자긍심은 스페인에 쉽사리 동점을 허용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엔리께는 이탈리아의 수비수 따소띠에게 팔꿈치로 얼굴을 가격당하며 코뼈가 주저앉아버리는 중상을 입는다. 클레멘떼는 그에게 교체를 요구했으나 엔리께는 결국 계속해서 뛸 것이라고 말했고 이런 그의 투혼 때문인지 스페인은 경기 종료 15분 전에 까미네로의 그림 같은 감아 차기로 동점 골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승리의 여신은 스페인의 것이 아니었으니 나이지리아전에서 혼자 두 골을 넣으며 이탈리아를 구한 영웅 로베르토 바조는 종료 3분 전에 수비사레따까지 제치면서 이날의 결승골을 성공시켰고 스페인은 또다시 8강에서 좌절해야만 했다. 코뼈가 주저앉는 부상을 당하면서도 뛴 엔리께는 패배가 결정된 이후에 그라운드에 주저앉아 하염없는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월드컵에서 한 골을 넣으면서 선전했던 그이지만 마드리드에서의 상황은 좋아질 분위기가 아니었다. 부트라게뇨가 멕시코로 이적하자 엔리께를 기용하기는커녕 아마비스까를 영입했는데 결국 그는 센터백으로 전향을 하면서 마드리드에서 잠시 센터백을 맡기도 한다. 그리고 이어진 발다노와의 불화는 엔리께에게 더 이상 마드리드에서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하기에 충분했고 때마침 마드리드로 들어온 까를로스, 셰도르프의 영입에 맞추어 엔리께는 1996년에 레알 마드리드의 라이벌 바르셀로나로의 이적을 감행하게 된다.

 

 

피구, 로날도, 쿠투, 블랑, 스토이치코프, 페레르 그리고 그와 금메달을 같이 일궈낸 과르디올라를 비롯한 바르셀로나선수들은 엔리께의 영입을 두 팔 벌려 환영해주었고 당시 바르셀로나의 감독이었던 롭슨은 엔리께를 다시 스트라이커로 배치한다. 역시나 거의 4년 만에 자신의 자리에서 뛸 수 있게 된 엔리께는 물 만난 고기처럼 그라운드를 종횡무진 활약했고 그 해에 15골을 기록하면서 팀을 프리메라리가 2위에 랭크시킨다. 그리고 97-98시즌에는 팀을 우승시켰는데 이번에는 라이트 윙으로 뛰어주면서 명실상고한 "세계 최고의 올 라운드 플레이어"라는 찬사를 한몸에 받게 된다. 한편 유로 96에서도 스페인대표팀으로 뛰면서 이제는 없어서는 안될 선수가 되어버린 엔리께는 다시 한번 월드컵의 문을 두드리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프랑스 월드컵 출전이었다.

 

나이지리아, 불가리아, 파라과이로 이뤄지며 이름하여 죽음의 조에 편성된 스페인. 과르디올라가 부상으로 빠진 불운 속에서 치러진 월드컵에서 스페인은 "펠레의 저주"를 다시 한번 떠올리면서 1회전 탈락의 치욕을 맛보았다. 나이지리아전에서 시작하자마자 날린 라울의 헤딩슛이 골대에 맞고 경기종료 직전에 날린 세르히의 스핀킥이 크로스바의 페인트칠이 벗겨질 정도로 빗나갔으며 파라과이전에서는 결정적인 찬스에서 칠라베르트에게 막히면서 운조차 따라주지 않았던 스페인. 물론 불가리아와의 경기에서는 6대1의 대승을 거두었고 엔리께는 이날 팀의 첫 득점을 올리는데 성공하면서 그의 전매특허인 팔 휘두르기 세레모니를 생 데티엔의 조르프기샤르 스타디움에 모인 관중에게 보여주지만 결국 탈락했고 쓸쓸히 피레네산맥을 건너 스페인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바르셀로나에서도 그의 위기는 계속되었다.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바르셀로나에는 기존에 있었던 클루이베르트, 보가르데, 라이지거, 코쿠에도 모자란지 젠덴, 데부르 형제까지 영입하면서 완벽한 오렌지 커넥션을 이뤘고 특히나 로날드 데부르는 그의 자리였던 포워드나 라이트 윙 자리를 빼앗아 간다. 소속팀 바르셀로나는 98-99시즌에 프리메라리가 2연패는 물론 코파 델 레이까지 우승하는 더블 크라운을 달성했지만 엔리께는 마드리드 시절 이후 다시 한 번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99-2000시즌에도 마찬가지였다. 걸핏하면 터져 나오는 당시 바르셀로나 총재였던 누네스와 피구, 그리고 리발도의 불화설 또 엔리께의 잦은 부상 등으로 리그 3연패를 노리던 바르셀로나는 데포르티보에 프리메라리가 우승을 내주어야만 했고 엔리께 개인적으로는 유로 2000에 출전하지 못하면서 스페인대표팀에 큰 타격을 주기도 했다.

 

 

그가 부활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바르셀로나가 피구를 내주면서 서서히 하향세를 그리던 그 시기와 맞물린다. 2000-2001 시즌에 바르셀로나는 불운했지만 엔리께는 깜 노우에서 열린 마드리드전에서 선제골을 넣으면서 이날 배신자 피구를 욕하기 위해 그리고 바르셀로나의 승리를 염원하기 위해 모인 10만여 명의 깜 노우 팬들을 열광시켰고 빌바오전의 7대0 승리 시에는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부활하는 디오스의 모습을 깜 노우의 팬들에게 그대로 각인시켜버렸다. 2002 한-일 월드컵에도 21번으로 발탁되면서 한국 땅을 밟은 엔리께는 라이트 윙으로 출전했으나 이제 32살이 되는 그의 나이는 속일 수 없었고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결국 한국전이 끝난 이후 바로 은퇴를 선언해 10년여의 스페인 대표팀 생활을 마친다.

 

 

그러나 바르셀로나에서의 그의 위상은 여전했고 과르디올라가 이탈리아로 이적하자 팀의 수뇌부들은 엔리께에게 팀의 주장완장을 채워주면서 엔리께는 이제 "새로운 바르셀로나의 까삐딴"으로 불리게 된다. 아틀레티꼬와의 개막전에서 혼자 2골을 넣는 등 언제나 변함없는 활약을 보여주면서 깜 노우의 팬들 그리고 바르셀로나의 후배들에게 투지라는 것이 뭔가인가를 잘 보여주며 전 세계의 팬들을 열광시켰던 이 축구선수는 결국 2003-2004 시즌 중반에 은퇴를 하면서 정들었던 팬들과 아쉬운 이별을 하게 된다.

 


사실 루이스 엔리께의 플레이가 정말 대단한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투박해 보이기까지 하는 엔리께. 하지만 정열적인 플레이 그리고 티비로 보는 팬들마저도 사로잡아버리는 투혼, 투지 넘치는 모습은 그의 팬이 늘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리고 화려한 시절보다는 오히려 어두웠던 시절이 많았고 그 어두웠던 시절을 하나, 둘 이겨내 가면서 결국 화려하게 은퇴를 할 때까지 축구라는 종목을 떠나서 모든 스포츠 종목의 선수들은 물론이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엔리께의 저 위대한 투지, 도전정신은 충분히 귀감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원문: 스페인 대표팀 팬 페이지